글쓴이 :
웹섬김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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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본은 혼란한 국정과 군사적 열세를 틈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 을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정치, 경제, 사회, 문화의 각 분야에 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 통치를 하자 여기에 1919년 3월 1일 정오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 본의 무단 통치에 항거했다. 일제는 3.1운동을 시위 848회, 참여 인원 50만여 명으로 공식 집계했었다. 그러나 최근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16년부터 3년간 3.1운동 100주년 기념 테이터베이스(DB) 구축 사업 을 진행해오면서 일본 육군성 자료인 ‘소요사건관계서류철’, 조선총독 부 자료 ‘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’, 외무성 기록 ‘불령단관계잡 건’, 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자료와 판결문 자료, 재한 선교사 자료 등 모두 2만여 건의 3.1운동 관련 1차 사료를 모두 분석한 결과 전국과 해 외를 합산한 총 시위 횟수는 1,716회로, 일본이 발표한 것의 두 배가 넘는다. 시위와 관련해 검찰에 송치된 인원은 모두 19,054명이었다. 1 919년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‘조선소요사건일람표’에 848건으로 기록되어 있지만,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1920년 상하이에서 간행한 ‘한 국독립운동지혈사’는 1,542건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오히려 그 기록 이 더 실제 숫자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. 사실 3.1운동보다 조금 먼저 같은 해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은 일본 국회가 개설되는 기간에 36년 만의 폭설 가운데서도 독립선언서를 신문사와 주요 인사들에게 발송하고 일제의 조선 식민화는 강제됐고 그 증거로 일제 지배 10년 동 안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벌여왔다는 사실을 강조한 선언서를 발표하며,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조선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함 으로 침략국 수도에서 식민지 청년들이 독립을 선언한 것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것으로 알려진다. 콜로라도에서도 100주년을 맞이해서 오 로라 시가 3월 1일을 유관순의 날로 제정하고 2월 25일 선포식을 앞두 고 있는데, 이 사실을 안 일본 총영사 (Midori Takeuchi)가 직접 방문하 여 외교적인 마찰로 번질 수 있다며, 오로라 시장 밥 르게어(Bob LeGa re)를 압박하고 있다. 5.18은 이미 김영진 의원을 중심으로 해서 유네스 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지만, 오히려 더 전국적이고 더 의미가 깊 은 3.1운동이 등재되지 못해 2년 전 역시 김영진 의원(장로) 중심으로 등재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가운데 덴버에도 동참하여 협력하는 중 이다. 독일의 한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상대방이 아파할 때마다 잘못했 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일본이 조금이라도 배운다면 한일 감정은 더 빨 리 해소될 것으로 생각된다. 우리도 이런 선조들의 용기의 믿음을 가지고 이민 사회를 살아가기를 소원한다. |